발리에서 생긴 일 +7

어제는 피곤해서 글을 안쓰고 그냥 잤다. 그래서 +6은 없고 그냥 7로 퉁~~

여행의 의미

어제 낮엔 요가원도 다녀오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스쿠터로 달려도보고 우붓에서 사는 재미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다. 추억도 추억이지만 이쯤에서 내게 여행은 어떤 의미였나 혹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주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집주인 가족과 저녁식사는 특별했다. 구름과 바람이라고 부르라는 집주인 내외분과 이야기 하면 할수록 나랑 비슷한 점도 많고 내가 미쳐 깨닫지 못한 부분도 알게 되고, 나도 아이를 가지면 저렇게 키워보고 싶다라는 욕심도 생긴 하루였다.

고등학생 첫째 아들과 중학생 둘째 딸, 구름과 바람은 이들을 온전한 두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모습이 옅보였고, 아이들과 대화하는 모습과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아이들을 인터뷰하고 있자니 과거에 그들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리고 그 결실이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로 돌아오는구나를 눈으로 확인했다.

친구의 의미

남미여행중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적이 있다. 여행이 주는 장점중에 하나는 세대와 관계없이 누구나 친구가 될수 있다!. 그땐 그런 생각을 했는데 구름과 얘기를 하다보니 아… 이게 여행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유독 그 나이로 친구를 가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라는 개념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적은 없지만 우리나라는 유난히 친구의 의미를 또래로 한정하고 있는것은 맞는것 같다. 한두살만 차이나도 친구하자보다는 형이라고 불러가~ 더 자연스러우니까…

어쨌거나 이런 문화는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내려온건 아닌것 같다. 오성과 한음도 5살 차이였음을 보면 또래 문화는 어쩌면 일제의 잔재 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던 나이로 친구를 나누면 친구의 폭이 굉장히 작아진다. 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인가? 세상에 나와 맘맞는 친구가 몇이나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어릴때부터 그 친구의 폭을 확 줄여서 같은 학년끼리만 친구를 맺어야 한다면… 좋은건 아닌것 같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첫째 아들에게 들었다. 이게 정말 신선하다. 이미 이 가족은 공동체 같고, 서로가 다 친구처럼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우려하지 않는 모습에서 너무 행복해보였다.

문송하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의미란다. 어제 안 사실인데 관점에 따라 언어파괴일수도 언어의 변화라고 얘기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건 내가 무슨말이지 못알아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정말..이대로 나는 꼰대가 되는것인가?

뭐 꼰대가 중요한건 아니고, 문과라서 죄송할 필요도 없고, 오늘 가상화폐와 관련된 논란의 그 토론을 보고있자니, 정말이지 문과가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 그 저녁식사도 입문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은 날인데, 오늘 토론도 보고 있자니 현실에서도 문과생들(유시민, 김진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은 순간이다. 코드만 팔게 아니라 인문학 서적도 더 열심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있는동안 옆지기가 들고온 책 2권을 꼭 다 읽어봐야겠다.

10년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의 이야기,

오늘 갑자기 캐나다로 돌아간다는 친구의 소식을 접하고 급하게 약속을 잡았다.
하루 종일은 아니지만 오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10년전 친구가 떠올랐다.
10년이란 시간은 친구의 이름도 잊어버릴만큼 오랜시간인가보다. 아까도 기억이 안나더니..

지금도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무슨 ‘아’로 끝났는데…

추억1.
이 친구의 이름이 기억이 안나서 그냥 A라고 지칭한다. A와 나는 B라는 친구를 통해 알게됐다.
B라는 친구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11년지기다. 지금은 시집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
A라는 친구는 B의 친구다. A는 미국으로 고등학교때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유학온 B를 만나 친구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A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놀러오게 된다. 나는 그때 B를 통해 A를 알게됐다.
금새 친해졌다.

추억2.
A가 한국에 있는 동안 종종 만나게 됐다. 단둘이 만나기도 하고, 셋이서 보기도 하고
때로는 또다른 B의 친구들과 함께 만나서 놀기도 했다. A는 한국에서의 많은 추억들을 사진기에 담았다.
그리고 얼마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공항에 B와 함께 배웅을 갔다.
A는 다시는 못볼 사람처럼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울먹이는 A를 토닥여주고 미국으로 보냈다.
건강해라. 친구야…

추억3.
공항에서 펑펑 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A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취업을 위해 왔다.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는 금새 일자리를 얻었다.
그렇게 첫 직장 생활을 한국에서 시작했다.
미국에서 왔을때 내 선물도 들고 왔다더니… 그 선물이 난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다보니 그 선물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아무튼 그렇게 또 종종 만났다. 2003년 2월이야기다.
난 2003년 3월 17일 입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추억4.
입소하기 2주일전,.. 어렵게 약속날짜를 잡았다. 그때 준다던 선물은 왜 안주냐며 슬쩍 던졌다.
미안하다며 밥으로 떼웠다. 그리고 북쩍이는 강남역, 헤어질 시간이다.
A는 잔돈이 없었는지 버스 정류장 앞 가게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잔돈으로 바꾸려한다.
병대야.. 너 뭐 먹고 싶어? / 나? 소세지? 새콤달콤?
그러더니 A는 가판대 위에 있던 소세지와 새콤달콤을 한움쿰 아니 양손으로 전부 짚어 들더니,..
내 손에 쥐어준다. “이거 먹고 군생활 잘하고, 100일 뒤에 보자!”

추억5.
난 입대를 했고, 4주 훈련을 받고, 301보충 대대에서 3일간 대기하다가, KTA 카투사 신병 교육대에 다시 입소했다.
거기서 다시 4주를 보내고 드디어 자대배치를 받았다. 카투사지만 전투병이다. 전투병인데 박격포다. -_-;;
자대배치 2주만에 두달짜리 훈련을 다녀왔다. 입대 후 100일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휴가는 받지 못했다.
엄마가 면회를 왔다. 그동안 내 휴대폰을 관리하던 엄마가 휴대폰을 건내주며 몇일전에 B에게서 전화가 왔었단다.
울먹이는 목소리라 뭔소리하는지 잘 모르고 전화가 왔더라고 전해주라 하더라고 한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해봤다. A의 소식이었다. A가 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추억6.
A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드디어 첫 휴가를 받았다. B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한국에서 취업하고 바쁘게 살던 A. 첫 여름 휴가로 필리핀 여행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도와 함께 하늘로 갔다.
A의 싸이월드를 방문했다. 그동안의 추억을 되새겨본다. 방명록에는 이미 수많은 지인들이 다녀갔나보다.
방명록을 쭈욱 보다가.. A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고 고맙다는 직장 동료의 글이 눈에 띈다.
파도를 타고 그 동료의 홈피를 방문한다. 그 동료의 사진첩에서 A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A로 부터 받았다는 생일 선물은 A가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직접 인화하고 핸드메이드로 만든 사진첩이었다.
디자이너의 시선이 가득 담긴 그 사진첩은 총 1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었고, A의 작품들로 가득했다.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겨가며 A의 시선과 생각들을 추적해본다.
그리고 10페이지째…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유일한 인물사진이다.
사진첩에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10년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의 이야기,..

아! 기억났다.
슬아야! 이제는 너의 얼굴이 가물거리지만,  
너와의 추억은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길…

그래도 주변을 둘러봅시다!

아무리 바빠도.. 한번씩만… 주변을 돌아보자..

어지러진 책상을 한번씩만 정리해보자..

어찌 사는지 알수없는 그대들에게 한번씩만 안부를 물어보자..

그래도 나는 잘 살고 있다오…

그대들이여..

지난주, 친하디 친한 친구중에 한명,.. 아니 두명이.. 시집 장가를 갔다..
같은날 같은 장소 같은 시간, 둘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참으로 행복하길.. 돌아오면,.. 나 맛나는것도 사주길..ㅋㅋ

그리고, 오랜만에 군대 친구들을 만났다..
대부분이 내 후임이었지만,.. 여전히 내가 무섭다던 그네들을 보면서..
내가 그런 이미지였떤가?.. ㅎㅎㅎ

모처럼.. 공감하는 이야기 보따리를 늘어놓으면서..
역시 사람은 많이 사귀어 놓고 봐야하는건가?..